- 설교 날짜: 2017년 9월 24일
- 설교 본문: 출애굽기 1장 8-21절
- 설교 핵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이다
출애굽기 1:8-21 (개역개정)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1: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1: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1. 서론: 젊음의 시기
- 시편 말씀을 보니깐 청년을 ‘독수리’에 비유하더라고요.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가 어떻게 생겼나요? 대머리입니다. 주름도 많죠. ‘청년과 대머리’ 어울리지 않죠. 그런데 독수리는 외모가 아니라 이런 습성이 있다고 해요. ‘태양을 곧바로 응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폭풍우를 견디며 날 수 있다’고 해요. 고대인들은 그래서 ‘독수리가 태양에까지 날아 올라가서 자신의 깃털을 새롭게 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스스로 소생할 수 있다’ 고 생각했다죠. 아마 성경에서 말하는 독수리도 ‘외모’가 아닌 것 같아요. ‘두려움이 없이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폭풍우 안에서 날개를 똑바로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젊은이와 같다’고 표현했던 것 같아요. - *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 경은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 감동적이고, 고무적인 업적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 사람이 이룬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죠.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마틴 루터는 35세에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완성한 것이 26세였습니다. 모차르트의 위대한 음악은 모두 35세 이전의 것들이었죠. 또한 현재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고 정치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마크 롱은 만39세(77년생)라고 합니다.
- 그러면 우린 어떤가요? 우린 두려움 없이 태양을 응시하며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나요? 폭풍우를 견딜 든든한 날개를 가지고 있나요? 25~40세에 위대한 업적이 이루어진다는데 지금 우리가 이룬 어떤 업적이 있나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그게 청년들의 삶이더라고요. 고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젊음, 윌리엄 오슬러가 말했던 젊은이들이 이룬 업적들. 그런 무거운 기대와 시선에 눌려서 기를 못 펴고 있는 세대가 청년들이더라고요.
- 그래서 제가 청년들과 사역하며 늘 부르던 노래가 있어요.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 쯤 쓱 지나가도 / 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에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장기하, ‘싸구려 커피’)
그러니깐 이 청년의 때에 꿈도 꾸고, 태양에 뛰어 들고, 폭풍우 따위 걱정 없는 그런 청년으로 살기는커녕, 싸구려 커피가 익숙해지고, 눅눅한 비닐장판이 깔린 집에 사는 것이 익숙해지고, 바퀴벌레 한 마리쯤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아직 덜 갠 하늘을 보는 것이 수만 번.. 그런 것에 익숙한 삶이 되어버리더라고요. - 젊은이들이 왜 그럴까요? 어쩌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이런 상황 있잖아요. ‘공중 그네를 타는 곡예사가, 지금 잡고 있는 그네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 상황이 온 거예요. 이제 다른 사람의 손을 잡거나, 다른 그네를 잡아야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까지 잡고 있던 그네에서 손을 놓을 타이밍은 얼마 안 남았는데, 다음에 잡아야 할 그네나, 잡아야 할 동료의 손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말이죠. 혹시 그네에서 떨어지면 부끄럽겠지만 나의 생명이라도 지켜줄 최소한의 보호 장치인 그물도 보이지 않는 상황’ 이런 상황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졸업은 다가오는데 취업 자리는 보이지 않고, 나이는 들어가는데 결혼할 상대가 보이지 않고, 취직한 이 자리는 정말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지 불안한 상황. 그런 모습이 청년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 본론Ⅰ : '숫자와 힘'이 지배하는 세상 - 그래서 성경 속에서 이런 불안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은 없었는지 찾아보다가,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이제껏 400년을 대를 이어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가야하는 것은 알지만, 너무나 가고 싶지만, 정확히 보이지가 않고, 거기 까지 갈 수 있을지 두렵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이 싫으면서도 익숙해져서 떠나기가 어려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죠.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불안한 미래에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상황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저에게 주신 은혜를 함께 나누려는 겁니다.
- 이제 출애굽기 1:8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출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 출애굽기는 창세기와 연결이 됩니다. 형들에게 팔려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지역에 7년 동안의 흉년이 찾아올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셔서 대비를 잘 하고 있었죠. 마침 요셉의 고향 땅에도 흉년이 찾아와서 형들이 곡식을 얻으러 애굽에 찾아오게 되고 요셉과 만나게 됩니다. 지난 일들을 서로 용서하고 요셉의 형제들과 가족들은 모두 애굽의 ‘고센’이라는 지역에 와서 살게 됩니다. 1-7절은 애굽에 와서 살게 된 형제들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죠(7절). - 그런데 방금 읽은 8절에 보니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난 겁니다. 여기에 쓰인 ‘알다’는 단어는 단순히 ‘정보만 아는 것’을 넘어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저도 여러분의 정보를 압니다. 그러나 정보를 안다고 해서 서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없죠. 대화를 한 번도 해보지 않고 교제를 한 번도 나누어보지 않고 정보만 아는 것으로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알다’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8절 말씀에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아마도, ‘요셉이 누구인지는 알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있지만, 그러나 그와 그의 자손들과 관계 맺고 싶지 않았던 왕’ 이라는 표현일 겁니다.
- 그의 다음 말을 보면 그 사실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왕이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9-10절입니다.
[출 1: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새롭게 일어난 왕의 관심은 오직 “숫자와 힘”에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지금 삶의 형편은 어떠한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이들이 “많은 숫자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죠. - 오직 ‘힘’에만 관심이 있는 바로 왕은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힘’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를 제어하고 ‘힘’을 꺾어보려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출 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 괴롭게 하여’ 성을 짓게 한 것이죠. - 그리고 무거운 짐까지 짊어지게 했는데도 자신의 뜻대로 안 되니, 이제는 ‘살인’을 명합니다. 15-16절입니다.
[출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 8절부터 나타난 ‘바로 왕의 말과 태도’를 보면서 우리 시대의 모습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① ‘사람과 사람의 교제는 없고 단지 정보만 알면 된다고 여기는 모습’, ② ‘인간의 내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겉으로 보이는 숫자와 힘으로 평가하는 모습’, ③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진 채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 이 세 가지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 ① 우리는 얼마나 바쁜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다들 얼마나 바쁜지 몇 초 스치면서 서로 정보만 나눌 뿐입니다. ‘대박! 오늘 왜 이렇게 예뻐!’ 확인되지 않는 거짓 정보도 많죠. 서로의 내면을 마주할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이 있어도 다만 몇 가지 정보만 나누고, 마치 서로를 다 안 듯 찝찝함을 남긴 채 헤어집니다. 그리고 또 이유 없이 바쁜 한 주를 살다가 다시 만날 땐, 한 주 동안 있었던 무언가 화려하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야만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죠. 우린 사실 별일 없이 살잖아요.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장기하, ‘별일 없이 산다’) 새로울 것이 없는데, 또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것에 지치죠. 바쁘게 사는 것이 미덕이고, 분주한 일상이 당연해진 지금 우린 정보밖에 나눌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 ② 또 우리의 삶이 어떠한가요? 사람들을 숫자와 힘으로 평가합니다. ‘몇 점의 학점을 따냈는지, 몇 점의 영어 점수를 가지고 있는지, 몇 개의 자격증이 있으며, 몇 군데의 이력이 있으며, 몇 년의 어학연수를 했는지, 부모의 재력은 어떠하며, 사는 집은 얼마나 크며, 차는 몇 cc 인지, 결혼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능력은 있는지..’ 회사는 우리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가 몇 점의 점수를 모아 놓았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는 서로의 내면을 알기 보단 서로의 능력을 확인하죠. 그리고 그렇게 모아 놓은 숫자들과 힘을 하나로 정리해서 결혼정보회사는 또 다시 순위를 매겨줍니다. 높은 순위를 얻어야 결혼 할 수 있죠. 숫자와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다만 높은 숫자와 힘만 소유하고 있으면 다 되는 겁니다.
- ③ 또 생명의 존귀함은 어디 갔는지,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에 대한 험담을 했다는 이유로 친구를 때리고, 욕 하고, 영상으로 촬영해서 자랑을 하고. 내가 가진 힘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한 생명을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리죠. 어쩌면 우리의 교육이 어려서부터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것을 가르쳐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SKY”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고등학교, 그 학교에 가기 위한 중학교, 그 중학교에 가기 위한 학원, 그 학원을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 속에서, 그 힘으로 누군가를 짓밟는 일을 어려서부터 너무 쉽게 배우며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죠.
-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니 우리들의 관심은 ‘생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숫자와 힘을 소유해서 살아남아야겠다는 것이죠. ‘삶의 진정한 가치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고, ‘힘과 능력이 세상을 지배 한다’ 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본론Ⅱ: 세상의 방식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 - 이렇게 ‘많은 숫자와 큰 힘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그 때’에, ‘큰 힘을 따라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 때’에, ‘십브라와 부아’라는 이름의 두 히브리 산파가 왕에게 명령을 받습니다. ‘아들이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출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 * 그런데 이 말씀 속에 ‘히브리’ 라는 단어가 ‘히브리인’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저쪽’ 혹은 ‘건너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세상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이쪽 편’이 아니라, ‘건너편의 세상에서 건너편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 결국 이 두 명의 히브리 여인은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17절이에요.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모두가 왕을 두려워하는 그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 여인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않기를 다짐 한 거예요. 이 세상의 주류를 따라가지 않은 겁니다. 남들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작은 생명도 존귀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라간 거예요. - 이 말씀을 읽으면서 먼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산파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산파’라면 결혼을 안 한 청년들은 아니겠죠. 아마 자녀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중년의 여성들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자녀들도 키워야 하고, 돈도 필요하고, 왕의 명령을 받았으니 일을 잘만 하면 나랏일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그냥 눈 딱 감고, 남들도 다 이렇게 한다는 생각으로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거든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깐,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을 복 주시려고 일자리를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어찌 감히 산파가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길 생각을 할 수 있었겠어요. 불가능한 일이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요?
- 그런데 다시 든 생각은, 이 두 명의 산파는 아마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건 고민해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거든요. 이건 수많은 결단의 훈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든요.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는 거니깐. 직장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니깐, 고민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 아니었을 거예요. 이들은 아마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반복된 훈련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 사실 이 두 산파가 안 죽인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남자 아기들이 다 살 수 있었겠어요? 정말 보잘 것 없는 두 여인 이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과는 상관없이, ‘숫자와 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선택하며 살았던 겁니다. 왜죠? 이 땅의 주권자는 내 눈앞에 보이는 힘이 센 바로 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온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숫자와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온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은 거예요. 비록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엄청난 피해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가지, ‘작은 생명도 귀하게 여기는 그 사명’을 붙드는 훈련을 하며 살았던 것이죠.
-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래요. 우리의 정보만 원합니다. 우리를 숫자와 힘으로 평가하죠. 생명의 존귀함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이죠. 그리스도인은 뭐 다를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들도 오직 ‘나의 하나님’만 있어요. ‘우리의 하나님’은 없죠.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믿어요.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에 까지 나아가지 않는 겁니다. 이 두 여인은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 저 연약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나의 목숨을 걸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왜죠? 눈앞에는 바로가 다스리는 세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인 것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4. 결론 - 청년들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한 삶을 살아요. ① 그래서 그 불안함을 이겨보려고 참 바쁘게 삽니다. 내가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 하죠. 너무 바빠서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저 만나면 정보만 나누는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살아요. ② 또 그 불안함을 이겨보려고 많은 숫자와 큰 힘을 따라가죠. 그러나 많은 숫자가 늘 진리는 아닙니다. 맥도날드의 ‘빅맥’이 억만 개가 팔렸다고 해서 ‘빅맥’이 좋은 음식을 의미하지 않아요. 소주가 1억 병이 팔렸다고 해서 소주를 좋은 음식이라고 말 하지 않습니다. 숫자나 규모는 우리에게 우상이 되기 쉬워요. 만약 숫자가 진리이면 애굽이 진리이고, 로마가 진리이고, 바벨탑이 진리였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숫자를 채우려 하지 말고, 내면을 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③ 또 우리는 남들에게 질까봐 불안해하죠. 조금 늦는 것뿐인데, 질 수 없어서 서로를 죽이려고 애를 써요.
-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 이 땅의 방식이 아닌 건너편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마치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생명처럼 여기던 것들,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던 것들, 확실하다고 믿어왔던 것들, 그래서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는 일과 같아요. ‘돈, 명예, 편리함, 사람들의 인정, 안정적인 삶’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하는 이 세상의 방식을 놓고, 그리고 내 비어있는 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인 겁니다.
- 예배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죠. 그 경외함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겁니다. 중요한 가치를 붙들기 위해 나의 안전과 평안과 위로를 포기하는 것. 정말 목숨을 걸고 붙들어야 하는 진리를 위해 나의 안전함은 주님께 맡기는 것. 절대 바꿀 수 없는 그 진리를 붙드는 일. 그게 예배에요. 그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겁니다.
- * 서두에 말했던 불안한 공중 그네를 기억하나요? 이제 붙들고 있던 그네에서 손을 놓아야 할 것 같은데, 다음 그네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다고 말 했던 그런 상황이요. 그런데 공중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옮겨갈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답니다. 1) 하나는 내 생명을 붙들어주고 있다고 믿는 그네에서 과감히 손을 놓는 일이에요. 2) 두 번째는 그네에서 손을 놓은 후에 절대로 파트너의 손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해요. 오히려 파트너가 내 손을 잡도록 완전히 믿고 맡겨야 하는 것이랍니다.
- * 한 목사님께서 ‘청년주일’에 설교 중에 하신 말씀이 있어요. 오늘 말씀을 잘 정리해 주는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일까요?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욕망의 문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우리 앞에 열린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 욕망의 사다리 윗단에 올라서기 위해 우리는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합니다. 욕망과 성취 사이의 시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가르칩니다. 기다림과 절제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닙니다. 그렇게 길들여지다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숨이 가쁘지만, 그 길로 내처 달립니다. 지금까지 추구하던 것을 다 작파하고 새로운 길을 걷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돌아보면서, 나답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는 삶의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김기석, 꾸짖을 용기_2016.9.25. 청년주일 설교 중) - 우리는 불안한 삶을 살아요. 그런데 우리의 불안함이 어쩌면 이 땅에서 더 좋고, 더 편하고,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 때문에 불안한 것은 아닌지 오늘 말씀을 통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뿐입니다.
[시 111:7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우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죠.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좀 더 연구해 보고 그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 청년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태양을 향해 돌진하고, 폭풍우 속에서 날개를 펴는 방식 말이죠. -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참된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처럼, 우리의 삶도 그 소중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감동적이길 원해요. 근사한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어떤 험난한 역경과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강인하게 살아내는 그 삶의 모습이 감동이길, 조금 멀어도 정직하게 발걸음을 디뎌가는 그 삶의 모습이 감동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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