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날짜: 2019년 8월 25일
- 설교 본문: 출애굽기 15장 22절 – 16장 4절
- 설교 핵심: 편안한 쉼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
출애굽기 15:22-16:4
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1. 서론: 풍요 속의 빈곤
- * 영국의 한 경제학자(John Maynard Keynes)가 한 말 중에 “풍요 속의 빈곤”(poverty in the midst of plenty) 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생산 양은 많은데 실제로 사람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양은 적어서 만드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결국 가난한 상황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기업에서는 쉬지 않고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정작 그 상품을 살 사람들이 없으니 점점 재고가 쌓이면서 생산이 위축되고, 실업률이 늘고, 경기는 어려워지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하는 것이죠.
- * 이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던 시절에 마을 중앙에 우물이 있었죠. 우물은 동네의 생명수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홍수가 나면 우물이 넘치면서 각종 오물이 섞이게 되고 흙탕물이 되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물을 퍼다 마시면 장염이 걸리기도 했죠. 그래서 나온 말이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은 넘치는데 정작 먹을 수 있는 물은 귀하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죠.
- * 어렸을 때 동네 뒷산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머니 따라, 아버지 따라 약수터에 올라가면 공기도 좋고, 넓은 공간이 있어서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죠.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면 작은 동네였지만 붉은 십자가가 정말 많이 보였습니다. 전부 교회의 십자가였죠. 지금도 교회는 정말 많습니다. 좋은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족함’을 느낍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때로는 주중의 예배도 참석을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내 마음은 공허함을 느낍니다.
-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풍요 속에 빈곤하며, 홍수 가운데 마실 물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많아요. 그러나 외롭습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외롭고, 늘 바쁘게 살아왔지만 이룬 것은 없고, 무언가 많이 하고 있지만 하나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고, 예배는 빠지지 않지만 변화는 없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 본론Ⅰ: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는 이 시대
- 이스라엘 백성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은혜를 눈앞에서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눈앞에서 물이 벽이 되었고,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넜고, 그 물이 다시 애굽의 군사들을 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 그리고 그 기적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삼일 길을 걸어서 수르 광야라는 곳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3일을 걸었다는 것은 상당한 거리를 의미합니다. 약 70km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더라고요. 그렇게 긴 시간을 걸으면서 마실 물을 찾았는데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22절입니다.
[출 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그리고 계속 걸어서 ‘마라’라는 곳에 도착해서 겨우 물을 찾았는데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23-24절입니다.
[출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지금 어떠한가요? 하늘의 기적을 경험하고,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어요. 15장 1-21절까지는 온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춤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고작 3일 후에 또 다시 문제를 만납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물을 벽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물 따위야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인데 지금 이들은 ‘물’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죠. 힘들게 물이 있는 곳에 갔는데도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을 받게 된 겁니다.
- 이 모습이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같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인 것은 배워서 알아요. 그런데 정작 삶의 현장에 나가면 우리는 ‘무지하고 무능해서’ 고통을 받아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것을 듣고 배우죠. 그런데 정작 3일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죠.
-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을 때, 모세가 부르짖었더니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정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나무를 던져서 쓴 물이 달게 되고, 백성들에게 물을 마실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이심을 말씀하시는데요. 출애굽기 15장 25-26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원망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그들을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의 첫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27절입니다.
[출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물이 열두 개 있고, 종료나무가 70그루 있는 곳. 메마른 광야 속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힘겨운 삶을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와서도 쫓기고, 마실 물이 없어서 원망이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료하시려는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엘림’을 만나게 하신 거예요.
#3. 본론Ⅱ: 엘림 – 교회의 모델
- 이 ‘엘림’이라는 곳, 성경에서는 여기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이 ‘엘림’이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보니깐, ‘야알’이라는 히브리어의 복수 형태입니다. ‘야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힘 센 것, 우두머리, 영웅, 용사, 능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요. 그러니깐 ‘야알’의 복수 형태인 ‘엘림’이라는 지명의 의미만 풀어서 생각해 보면, ‘힘센 것들, 우두머리들, 영웅들, 용사들, 능력 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입니다.
- 또 그곳에는 우물이 열두 개 있다고 해요. 열 두 지파가 경쟁할 필요 없이 하나씩 차지해서 그 주변에 가족들을 머물게 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 70그루 있었습니다. 7은 히브리인에게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70은 히브리인의 숫자 체계에서는 7의 다음 세대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일의 자리면, 아들은 10의 자리와 100의 자리로 이어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말하는 숫자가 1이라면 아들은 10이나, 100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니깐 그들의 생각 속에 70이라는 숫자는 다음 세대까지 넉넉하게 쉴 수 있는 숫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 종려나무는 뿌리가 100~200m까지 깊이 뻗어 내려가는 나무라고 해요. 나무가 크고 잎이 무성해서 광야 생활에서는 좋은 쉼터가 되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려서 물을 끌어오기 때문에 생명력도 강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번성한 국가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죠. 솔로몬의 성전 벽에 이 나무의 그림이 그려질 만큼 온 백성에게 사랑받는 나무였습니다. 왕을 표현하는 나무였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습니다.
- 그러니깐 이 엘림은 어떤 곳인가요? 이름의 뜻으로만 본다면 ‘용사들, 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겠고, 실제로는 우물이 넉넉해서 12지파가 싸울 일이 없고, 뿌리를 깊이 내리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종려나무가 다음세대까지 품어줄 수 있을 만큼 가득한 곳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애서 나와서 마라를 지나 엘림에 진을 친 이 장면을 보면서, ‘이 땅의 교회가 이러한 엘림과 같은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①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용사들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지으신 능력의 사람이야!’라고 말 해주며 자존감을 세워줄 수 있는 곳, ② 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우물을 넉넉하게 주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풍성히 나누어 주는 곳, ③ 나만 살기도 바쁜 세상에 다음 세대까지 생각해 줄 수 있는 곳 말이죠. 이런 곳이 교회가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라스베가스에서 사역을 하는 ‘저드 윌와이트’(Jud Wilhite) 목사님이 있습니다.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이 책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두란노, 2015)라는 책에 그 목사님의 일화가 소개되었는데요. 저드 목사님은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라고,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였고, 사업을 잘 해서 성공한 모범적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면 늘 다른 데서 놀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갈 때 부모님께서 ‘오늘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니?’ 라고 물으시면, 부모님이 좋아하는 대답인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대요.’ 라고 대답을 하며 지나갔다고 해요. 그렇게 사춘기를 만난 저드 목사님은 방황을 하게 되고, 14살엔 차를 훔쳐서 타고 가다가 사고를 내고, 17세가 되어서는 안 해본 마약이 없을 정도로 모든 마약을 경험하고 중독이 되어서 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요.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죽으려다가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저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잘 돌아왔다’ 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죠. 그렇게 다시 결심을 하고 모든 마약을 버리고 하나님께 약속을 합니다. ‘마약의 세계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 그리고 이 일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유혹과 싸우기 시작했는데요. 이 목사님이 책에서 했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마음을 잡고 혼자서 그 싸움을 싸워보려고 다시 동네에 있는 교회에 나갔을 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자신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존중해 준 겁니다. 방탕한 삶을 살던 자신이 돌아왔을 때, 그를 이해해주고, ‘너는 용사다!’ 라고 말 해주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라고 말 해주고, 그의 존재를 세워주었던 동네 교회에서 느낀 따뜻함 때문이었던 것이죠. 이 저드 목사님에게 교회는 엘림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죠.
- 우리 이태원교회, 갈렙 청년부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 걸까요? 광야 속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어야겠죠. 풍요로움 속에 빈곤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빈곤 속에서도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곳이어야겠죠. 수많은 교회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모이면 행복하고 풍성한 나눔이 있는 곳, 경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곳,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해 함께 준비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고, 우리 갈렙 공동체가 꿈꿔야 할 곳이 아닐까요?
- 우리가 함께 그려보고 함께 만들어갈 공동체의 모습. 자존감이 무너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지으신 소중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곳,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며 용납해 줄 수 있는 곳, 더 소유하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승리한다는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나눔의 원리가 실현되는 곳, 우리 청년부가 ‘메마른 땅의 엘림’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태원교회가, 이 땅의 교회들이 목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여러분들이 그런 모임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믿음의 고백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만큼 우리의 공동체도 분명 주님이 세우시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제 조금씩 갈렙 청년들을 향한 이런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느리지만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들을 움직이시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리라 확신합니다.
#4. 본론Ⅲ: 그러나 엘림을 떠나야 합니다 - 원래는 여기까지만 읽고 말씀을 맺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뒤에 있는 16장 말씀을 통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 지나고, 둘째 달의 15일이 되었으니, 애굽에서 나온지 약 45일이 된 겁니다. 그러면 홍해 앞까지 걸어온 기간,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기다리고,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를 지나 마라까지 온 시간, 마라를 지나 엘림까지 온 기간을 전부 합쳐서 약 일주일이라고 본다면, 엘림에서 머문 기간이 최소한 한 달이 넘습니다. -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머문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16장으로 넘어가면서 ‘엘림을 떠나 신 광야’로 향하는 이야기가 바로 기록되고 있어요. 그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누린 풍요로움, 넉넉함, 자존감을 세워주고, 풍성함을 경험하며, 다음 세대까지 생각하는 행복한 기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 이 부분이 저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는데요. ‘이곳이 정말 좋은 곳이었다면,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분명히 기록했을 텐데, 왜 없지?’ 엘림에 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명하고 불평하는 장면을 기록했다면, 분명히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도 기록해야 할 텐데 말이죠.
- 그리고 엘림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놀랍게도 또 불평을 합니다. 출애굽기 16장 2-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출 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하기 시작하더니 ‘차라리 배불렀을 때 죽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 참 놀랍죠. 성경은 지금 마라에서 원망하던 모습을 기록하다가 엘림에 갔죠. 그런데 그 행복한 한 달 간의 엘림의 시간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이번엔 또 신 광야에 가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 마치 우리에게 행복한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시 월요일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죠.)
-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지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광야의 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 엘림은 참 좋은 곳입니다. 안정적인 곳이에요. 풍요롭습니다. 반면에 광야는 안정적이지 않아요. 힘이 들죠. 먹을 것이 없고, 마땅히 마실 물도 없죠. 하나님께 구해야 겨우 먹을 물이 있고, 하나님께 구해야 겨우 먹을 것이 생깁니다. 혼자서는 물도 밥도 먹을 수 없는 것이 광야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엘림과 같은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엘림에 평생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편한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의 척박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교회가 엘림과 같은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편안하고, 쉴 수 있고, 상대를 존중해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경쟁이 없고, 나눔이 풍성하고, 우리의 인생에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는 곳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요. 우리가 그 자리에 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가지고 궁핍을 경험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곳이 비록 원망의 자리일지라도, 그 부르심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니 말이죠.
#5. 결론 - 말씀을 정리하면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세 가지만 간단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1) 우리는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배면 예배, 찬양이면 찬양, 설교면 설교 최선을 다해 참여하고, 좋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은혜를 사모하셔야 해요.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엘림과 같은 공동체로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 2) 두 번째, 교회에서 그런 풍요로움을 경험했다면 이제 내 기쁨에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이 섬기며 봉사 할 수 있는 일, 셀이 함께 할 수 있는 섬김을 찾아보시고 실천해야 합니다. 가만히 와서 예배만 드리면 안 됩니다. 주보라도 접던가, 끝나고 갈 때 주보라도 치우던가, 교회학교 교사를 하던가. 여러분, 공동체는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워집니다. 희생이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평일에는 쭈그리고 지내다가, 주일만큼은 화장을 예쁘게 하고 반짝이는 모습도 물론 예쁘지만, 땀 흘리며 봉사하는 모습이 정말 예쁜 겁니다.
- 3)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평안하고 안정된 자리에 머무를 것인지, 조금 위험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지. 물론 안정적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좋겠죠.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길은 결코 평안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들어가는 문도 좁고, 걷는 길도 좁아서 찾는 이가 없는 길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셔야 해요.
-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광야와 같은 자리로 이끄시기도 합니다. 엘림에 머물게 하시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만든 이야기가 없어요. 성경은 단 한 절로 정리하죠. 그러나 광야에서의 삶은 출애굽기를 거쳐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시는 분이세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엘림 너머의 삶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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